수타면, 아니 '족타면'
몇 년 전 한 장의 발 사진이 인터넷에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척박한 황무지와 다를 바 없었고, 사람의 손이라고는 탄 적이 없는 매몰찬 흙 밭처럼 보였다. 울퉁불퉁했다. '못생긴' 발의 주인공은 뜻밖에 고운 자태의 발레리나 강수진씨였다. 최고가 되기 위한 피나는 노력의 결과물이라고 했다. 발레리나에게 발이란 자신을 무대 위로 한껏 날아오르게 하는 지렛대지만 요리사는 어떨까?
흔히 음식은 손맛이라고 했다. 하지만 '발맛(?)'이 중요한 음식도 있다. 족타면이다. 말 그대로 발로 밀가루 반죽을 밟아 맛을 내는 면이다. '수타면'에 조응하기 위해 생긴 이름으로 보이는데, 수타면보다 쫄깃하다고 주장하는 국수 마니아들도 많다. 면의 쫄깃함은 밀가루의 글루텐 형성과 관련돼 있다. 치대고 밟는 동안 밀가루 결마다 글루텐이 촘촘히 형성된다. 그러니 어떻게 반죽하고 어떻게 치대는 지가 중요할 수밖에. 일본 만화 <맛의 달인> 4권에도 족타면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주인공의 단골 우동집 주인은 "손보다는 체중이 실린 발로 밟는 게 쫄깃쫄깃해"진다고 설명한다.
<우동카덴의 자루우동>
일단 족타면은 만들기가 수타면보다는 수월해 보인다. 예전에 일본의 100년 된 맛집을 여행한 적이 있다. 수타면 장인을 만났는데, 긴 세월 면을 쳐서 손과 팔이 성하지 않다면서 고충을 털어놨다. 밟는 행위는 그런 고통으로부터는 왠지 자유로워 보인다.
족타면은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흔히 고약한 것을 빗대어 말할 때 '발 냄새'를 들먹거린다. 듣는 순간 코털부터 확 선다. 발 냄새의 위력을 알기 때문이다. 그 발로 우리 입에 들어가는 면을 만들다니!
'면식수행'(麵食修行)란 말이 인터넷에 돌만큼 면 요리를 좋아하는 마니아들이 많은 시대다. 최근 족타면은 면 요리 마니아들의 혀를 사로잡았다. 요즘 그들이 찾는 우동집, '우동 카덴'. 족타면 우동이 있다. 화려한 홍익대 먹자골목에서 뚝 떨어진 후미진 골목에 있다. 실내풍경은 평범한 일식집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22가지 우동은 '우동 카덴'의 오너 셰프 정호영씨의 후배 박상현씨의 발 솜씨(?)다. 반죽한 밀가루를 5시간 숙성시키고 족타하고 난 다음 적당한 크기로 잘라 덩어리를 만든다. 그 다음 12시간 숙성시킨다. 그리고 난 다음에 제면한다. 차가운 우동의 면발은 그야말로 단호하다. '탱탱함의 진수를 보여 주겠어' 외치는 듯하다. 입안에 빙판 선수처럼 쓱 미끄러져 들어간다. 언제 식도로 넘어 갔는지 모를 만큼 순식간이다. '멘타이코 우동'은 명란을 비벼먹는 찬 우동인데, 비비고 나면 알들이 도톰한 면벽에 다닥다닥 붙어있어 씹을 때마다 묘한 식감을 선사한다. 뜨거운 우동은 밀어낸 겨울을 다시 부른다.
<우동카덴의 멘타이코 우동>
잘 부탁하면 이자까야카덴의 사시미도 우동카덴에서 맛볼 수 있다. 정씨는 인근 망원동에 '이자까야카덴'도 운영한다. 작년 3월에 문 연 이자까야카덴도 식도락가들 사이에서 꽤 이름이 나 맛계의 유명 인사들이 많이 찾았더랬다. 최근에는 허영만 선생의 방문도 목격됐다.
정씨는 일본의 명문조리학교 '츠지조'를 졸업한 재원이다. 망원동에서 태어나 자랐다. 마치 연어처럼 고향으로 돌아온 셈이다. '발 솜씨'를 자랑하는 박상현씨는 오사카의 유명한 우동집 '츠루동탄'에서 일했다. 선배 정씨의 부름을 받고 한걸음에 달려왔다. 본래 일본의 족타면하면 일본의 사누키(시코쿠 지방 가가와현의 옛이름) 우동이다. 하지만 오사카에도 명성이 자자한 우동집들이 많다. 정씨는 유학시절 우동 맛을 보고 놀랐다. 한국에서 우동은 그냥 허기질 때 간단하게 때우는 음식일 뿐이었다. 달랐다. 면의 다른 세상이었다. 그 우동 맛을 내기 위한 기지가 우동카덴이다. 그는 가게를 열 당시 한 가지 고민에 봉착했었다. 일본은 반죽용 물이 '연수'인데 반해 서울에서 구할 수 있는 물은 대부분 경수였다. 다행히 지방에서 연수를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연수구입처는 비밀이란다.
합정역 후미진 뒷골목에 자리 잡았지만 차고 쫄깃한 면 맛을 보겠다고 찾는 이들이 많다. 정씨는 "우동하면 추운 겨울에만 먹는 음식이다, 여름에는 역시 소바다, 하시는 분들이 많으신데 아니다. 차가운 우동이야말로 뜨거운 여름을 시원하게 보내는 방법이다"라고 말한다. 문을 나서는 발걸음이 가볍다. 때 이르게 찾아온, 30도가 넘는 날씨가 무섭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