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의 나라 중국. 요리대전(菜谱大全)에 나오는 레시피만 500여개가 넘는다. 이름도 각각 색다르고 유래도 다양하다. 주식으로 밥보다 면을 더 좋아하는 나라 중국. 여행을 다니다 보면 가끔 생전 처음 들어보는 면과 만나게 된다. 맛도 보고 어떻게 만드는지 언제부터 누가 만들어 먹었는지를 풀어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베이징 서쪽 버스로 4시간 거리에 있는 허베이(河北) 난천(暖泉)은 토담으로 쌓은 고성이다. 흙으로 쌓은 고성 마을을 두고 베이징대학출판사 미술편집자 린성리(林胜利)는 '마치 45년 전 베이징 고성에서 놀던 때처럼 흥분되는 곳'이라고 했다. 현대 도시에서 사라진 인심이 남아있는 시골로 가는 여행은 어느 나라라도 들뜬다. 우연히 풋풋한 된장처럼 묵은 먹거리를 만난다면 더 없이 좋다.
<토담고성>
고성 허름한 식당에서 쿠챠오허러(苦荞饸饹)를 만난 것은 행운이다. 쿠챠오는 타타르 민족이 즐겨먹었다는 메밀이다. 허러라는 말은 '틀국수'라는 말이니 메밀로 만든 틀면이다. 틀로 뽑아낸 면, 어떻게 만드는지 궁금해진다.
메밀반죽을 단단하게 하는 것이 묘미다. 반죽을 틀에 넣고 힘껏 누르면 굵직한 면발이 아래로 떨어진다. 틀 아래 끓는 물이 자동으로 면을 익게 한다. 연한 황금빛으로 면발이 굵은데 부드럽고 쫄깃하다. 따로 만들어둔 육수 맛도 마셔도 될 만큼 구수하다. 삶은 채소나 계란을 넣어 함께 먹는다. 한 그릇에 4.5위안(약 8,500원)이다. 싸고 맛도 좋고 배도 부르다.
<쿠챠오허러>
쿠챠오허러는 중국 서북부 신장(新疆)에서 허베이까지 장장 천 킬로미터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분포하는 민간요리다. 북방 유목민족 타타르족의 메밀을 소재한 면이다. 타타르족은 범 투르크계에 속하며 대부분 이슬람교를 믿는다. 당나라 시대부터 역사에 등장하며 돌궐족, 몽골족과 경쟁하며 살았다. 중국 55개 소수민족 중 하나로 서북부 신장위그루자치주에 5천 여명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동유럽에도 많이 거주하며 러시아 모스크바 동쪽 볼가 강변에 타타르스탄 자치공화국을 이루고 있다.
베이징 서쪽 한 작은 마을에 음식 이름으로 생전 처음 들어보는 민족의 흔적이 남아있다니 음식문화는 참으로 놀랍다. 황하를 따라 형성된 마을에 가면 길거리 시장에서 면발을 짜내는 틀을 가끔 본다. 육수를 부어 먹기도 하지만 반면(拌面), 즉 비빔 면으로도 먹는다.
난천고성은 허베이 위현(蔚县)에 속한다. 한 글자 이름의 현은 진나라 군현제의 흔적으로 '2천 년'이라는 세월을 담고 있다. '이 방은 위험하니 주의하라'는 팻말이 걸릴 정도로 아무도 손질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유네스코가 중국 각 지역을 조사해 발표한 '천년고현(千年古县)'에도 포함된다. 수많은 단자(單字) 현이 쌍자(雙字)가 돼 사라졌지만, 전국적으로 110개 가량 살아남았다. 독자(獨字) 현이라고도 불리는 현에 가면 그만큼 사람 냄새 나는 풍물이 풍부하다.
<난천 '천년고성'에 있는 '주의' 팻말>
난천고성에서 가장 유명한 먹거리는 말린 두부다. 고성이 온통 두부공장이다. 형기두부점(邢记豆腐店) 간판이 걸린 집으로 들어가니 할머니 몇 분이 열심히 두부를 팔고 있다.
형(邢)은 허베이 서남부 싱타이(邢台) 시를 기반으로 했던 주나라 제후국 이름이다. 나라 이름이 나중에 성씨가 됐다. 가게 주인이 형씨인 셈이다. 재미있는 것은 '기(記)'인데 '기록'의 뜻이기도 하지만 '인장(印章)'의 의미도 있다. 다른 곳과 구분하기 위해 도장을 찍어두는 것처럼 점포를 표시한다. 성과 함께 써서 다른 점포와 구분하기 위해 썼는데 어느덧 '기'자가 들어간 이름은 전통 있는 가게를 뜻한다.
<형기두부점, 콩으로 두부 만드는 과정>
두부가 큰 쇠솥에 잔뜩 물에 담겨 있다. 햇빛에 말리면 딱딱하게 굳어지고 다시 약한 불에 불리면 쫄깃쫄깃한 두부가 된다. 창문에 비친 햇살을 머금고 긴 깍두기처럼 놓여있다. 오래 굳어서 딱딱하다. 옆 아궁이 위에 쇠솥이 있고 두부가 은은하게 익는 중이다. 말렸다가 다시 물에 불리기를 반복하면 마치 고기처럼 쫄깃한 이 지방만의 특산이 된다.
<건조 두부 불리기 작업과 완성된 쫄깃한 식감의 두부>
중국 두부는 향이 진해 마치 탄내가 나는데 이곳 마른 두부는 생생한 맛을 유지하고 있다. 채식주의자를 위해 삼겹살 대신 두부고기로 구워먹어도 좋아 보인다. 콩을 갈아서 만든 두부는 바로 먹어야 물렁물렁하고 맛있지만 금방 상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보관하면 오랫동안 먹을 수 있다. 생각해보니 쿠챠오허러 위에 두부를 올려 먹어도 괜찮겠다 싶다.
고성을 나와 길거리 시장으로 간다. 말린 두부와 메밀 틀면을 먹으려고 사람들이 줄줄이 기다린다. 말린 두부 한 접시는 2위안(약 380원)이니 쿠챠오허러 먹은 지 1시간도 지나지 않았지만 그냥 가긴 아쉽다. 쫄깃하고 담백한 두부에 양념을 올려 먹는데 배가 터질 지경이다. 사람들이 좌판에 앉아서 허겁지겁 끼니를 때우는 모습도 정겹다.
<고성마을의 길거리 시장>
그런데 바로 옆에 할아버지 할머니 부부가 장사하는 자리에 사람들이 많다. 할아버지가 둥근 그릇 안에 담긴 것에 젓가락으로 죽죽 금을 긋는다. 완두로 만든 묵 덩어리다. 스무 번 가량 나누니 면발로 변한다. 바로 이런 것을 묵사발이라 부르는 것은 아닐까 궁금하다. 연두색 은은하게 돋는 이 면을 펀퉈(粉坨)라고 부른다. 칼로 잘 잘라 먹는 대신에 그릇 속에서 화려하게 면처럼 변신하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묵에서 면으로 변한 걸 뭐라고 불러야 할 지 모르겠다. 묵이야 면이야? 그릇 속에 익힌 묵을 식힌 후 이렇게 잘게 면처럼 먹는다. 완두, 녹두, 메밀을 재료로 사용한다.
<펀퉈(粉坨)>
사람들이 주문할 때마다 할아버지가 그릇 안에서 젓가락 질을 하고 할머니는 고추기름을 담아 내준다. 신기한 음식을 보면 그냥 넘어가기 어렵다. 사람들이 한 그릇으로 그치지 않고 두 그릇, 세 그릇도 먹는다. 1.5위안, 약 300원도 채 되지 않는다. 맛이나 풍물은 돈과 상관 없이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