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크리스마스 시장에서 만난 한국의 맛, Schupfnudeln
한 눈에도 두꺼워 보이는 회색 구름이 켜켜이 늘어진 독일의 겨울 하늘을 보고 있으면, 이미 지나간 12월의 크리스마스 분위기는 마치 꿈을 꾸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이 곳 독일의 겨울, 즉 11월 말경부터 그 다음해 2월까지는 해가 뜨는 날씨를 접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여기서 지낸 지도 어느 새 삼 년이니 이제 적응이 될 법 하지 않나. 그러나 밖은 영하로 내려간 기온에 모든 것이 얼어붙어도 하늘만은 파랗고 햇살이 눈부시게 비치던 한국의 겨울 날씨를 생각하면, 왠지 기분이 가라앉는다. 그 기분이라도 떨쳐 보려고 아침부터 진하게 커피를 내려 마시곤 한다. 그리고 지난 12월의 소박하지만 예쁜 풍경이 펼쳐지던 크리스마스 시장을 머릿속으로나마 돌아본다.
<다양한 독일의 크리스마스 시장>
11월 말이 되면, 독일은 전국이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분위기로 갑작스레 탈바꿈한다. 기독교의 전통이 오래 남아 있는 독일은, 특히 대림절(크리스마스 전 4주간의 기간) 시기를 축제처럼 지내는 것이 당연시되는 분위기다. 그래서 크고 작은 각각 도시 별로 시내의 주 광장에 크리스마스 시장을 열고, 거리에는 각종 다양한 모양의 전등을 내걸거나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운다.
크리스마스 시장은 보통 약 한달 정도 여는데, 시장에는 각종 기념품부터 다양한 먹을거리를 파는 가판대들이 세워진다. 그리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회전목마나 놀이기구들이 같이 설치되곤 한다. 11월이 되면 오후 4시만 되어도 어두워지고,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거리의 상점들도 저녁 6시 반에서 7시면 문을 닫기 때문에 겨울의 독일 밤거리는 을씨년스럽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기간만큼은 독일의 어느 동네를 가든 반짝거리지 않는 곳이 없다.
독일 사람들은 이 기간에 크리스마스 시장에서 친구들을 만나거나 가족끼리 나와 시간을 함께 보낸다. 추운 날씨니 따뜻한 음료나 술을 마시고, 숯불에 구운 소시지를 먹으면서 한참을 서서 이야기 꽃을 피운다.
그래서 독일에 온 이후, 매년 12월이 다가오면 어느 도시의 크리스마스 시장을 가 볼까 하며 여행계획을 짜게 되는데, 이제는 그것도 하나의 의식 같다. 앞으로 다가올 긴긴 겨울을 잘 이겨내려면 예쁜 불빛이 반짝이는 시장에서 따뜻하게 데운 글뤼바인(Glühwein: 각종 향신재료를 넣고 데운 와인)을 마시면서 기분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 보통 크리스마스 시장에 가면 글뤼바인 외에도 브랏부어스트(Bratwurst: 그릴에 구운 소시지)를 먹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동네 별로 다른 곳에서는 보지 못했던 특식을 파는 곳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 중 지난 2012년에 갔던 라덴부르크(Ladenburg)에서 맛본 슙프누델른(Schupfnudeln)은 아직도 생각나는, 다시 먹고 싶은 음식이다.
우연히 찾아간 라덴부르크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관광지인 하이델베르크(Heidelberg)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자동차로 유명한 칼 벤츠(Carl Benz)가 살았던 동네로 알려진 곳이다. 정말 작고 소박한 도시였지만, 역시 그 곳에도 도시 한복판에 아기자기한 크리스마스 시장이 들어서 있었다. 크리스마스 시장 주변에 가면, 눈보다도 코가 먼저 시장의 위치를 감지한다. 계피, 정향, 그리고 과일 향이 어우러진 와인 냄새가 시장을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찾아가게 되는 곳은 글뤼바인을 파는 가게다. 따뜻한 와인 한 잔을 주문해 받은 후, 천천히 주위에 어떤 가게들이 있나 돌아본다. 마침 저녁시간이라 허기를 달랠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매의 눈처럼 시장을 둘러보는데 갑자기 나의 후각을 의심할만한 냄새가 코 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 냄새는 너무 친숙한 우리 한식의 향이어서 어리둥절했다. 감칠맛이 돌 것이 틀림없는 잘 익은 김치를 기름에 윤기 나게 볶는 냄새! 독일 남부의 어느 작은 시골 도시의 한 구석에서 군침 도는 김치 냄새를 맡게 될 줄이야. 갑자기 와인으로 후끈하게 데워진 몸은 식욕에 민감해져 위장이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슙프누델른을 파는 가게>
궁금한 마음 반, 의심스러운 마음 반으로 급하게 발길을 옮긴 곳에 서 있는 작은 가게는, 의외로 넓적한 철판에 미니 떡볶이처럼 생긴 국수를 볶고 있었다. 그 통통한 굵기의 국수의 이름이 뭐냐 물어보니, 'Schupfnudeln(슙프누델른)' 이란 짧은 대답이 돌아온다. 호기심에 가판대 앞에 서 있는 사람들 사이로 들어서서 철판 위에서 조리되고 있는 요리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잘 보니 국수만 볶는 것이 아니라, 독일식 양배추 김치인 자우어크라우트(Sauerkraut)를 함께 볶고 있었다. 그제서야 왜 낯설고 낯선 이 크리스마스 시장에서 김치 볶는 냄새가 진동했는지 이해가 갔다. 차례를 기다려 한 접시를 주문하니 일회용 종이 접시에 그득히 볶은 국수를 얹어주고는 포크를 하나 꽂아 준다.
<철판 위에서 자우어크라우트(Sauerkraut)와 함께 볶는 슙프누델른>
뜨거운 슙프누델른과 자우어크라우트의 궁합은 어떨까. 얇고 허술한 1회용 종이 접시 위에서 국수가 떨어질까 싶어 조심스레 포크질을 했다. 국수 두어 가닥과 함께 딸려온 양배추김치의 맛은 실로 기묘했다. 버터향이 감도는 가운데 살짝 꼬들한 양배추김치와 부드러운 국수의 식감도 좋았지만, 맛은 우리 한국의 흔하고 흔한 김치볶음면과 비슷한 맛이었다. 이것이 독일 남부지방의 전통음식이라니, 믿겨지지 않았다. 고춧가루가 없는 볶음김치국수라고 우기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감탄하면서 맛을 보다 보니 어느 새 수북이 담겨 있었던 국수가 사라지고 종이 바닥만 보인다.
어딘가에서 아코디언과 함께 캐롤 연주가 시작되어 주변을 돌아보았다. 오래된 독일 전통 가옥이 늘어서 있는 가운데 여기저기서 몰려와 삼삼오오 와인을 홀짝거리며 즐거워하는 사방의 사람들은 파란 눈과 하얀 피부의 서양인이 대다수인, 낯선 풍경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나는 독일에 있는 것이 아닌, 한국의 어느 작은 시골 마을의 국수집에 들러 볶음김치국수를 맛본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슙프누델른과 자우어크라우트 볶음>
노란색의 손가락 굵기 정도 되는 짧은 국수는, 독일어로 슙프누델른 혹은 핑거누델른(Fingernudeln)이라고 불린다. 독일 남부지역과 오스트리아에서 주로 만들어 먹는다는 이 국수 같지 않은 국수는 역사가 제법 오래되었다. 13세기 전쟁터에서 군인들이 음식 배급을 받을 때 주로 호밀을 받아 만들어 먹기 시작한 것이 그 유래이다. 이후 17세기에 독일에 감자가 들어오면서는 국수를 만드는 주된 재료에 감자가 포함되었다고 한다. 전통적으로 만드는 방법은 직접 손으로 반죽해 손으로 빚어내는 것이며, 제대로 만들려면 하루 이상이 걸린다. 이 국수를 먹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 중 가장 좋은 방법으로 추천되는 것은 독일식 양배추 김치인 자우어크라우트(Sauerkraut)와 함께 먹는 것이라 한다.
여행을 추억하며 사진을 다시 보니, 입안에 군침이 돈다. 집 근처 슈퍼마켓에서 파는 슙프누델른을 사다가 냉장고에 남아있는 백김치를 꺼내 함께 볶아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