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빛 물의 나라에 사는 요족 아가씨는 너무 관능적
귀주 남부 '구채구' 대소칠공과 소수민족 요족의 전통복장
귀주는 매년 3번 이상 가게 된다. 인연이 깊어서인지 갈 때마다 친숙하다. 소수민족이 오래 터전을 일궈온 터라 그렇다. 귀주 남부의 흥건하고 풍성한 정서와 만나러 간다. 세상에 자랑해도 전혀 모자라지 않을 풍광도 있다. 귀양(贵阳)에서 300km 남쪽에 ‘물의 도시’ 여파(荔波)가 있다. 4대 미인 양귀비가 좋아했다는 과일 여지(荔枝)의 상큼한 속살을 떠올려도 좋다. 여지처럼 아열대 기후대에 위치하는데다가 파도까지 연상되는 지명이다. 카르스트 지형이 빚은 천연의 물빛이 초록으로 녹아있으니 바로 대소칠공(大小七孔)이다.
여파로 가는 길은 4시간이나 걸린다. 휴게소에 들러 콴펀(宽粉) 한 그릇을 먹고 나오는데 커다란 차호(茶壶)가 입가심하라고 부추긴다. 차 브랜드인 천복(天福)이 만든 것인데 물이 끊임없이 순환하는 장치로 사람을 즐겁게 한다. 차량이 많지 않은 도로지만 때로는 차량 두 대가 길을 가로막는다. 험준한 산길도 넘는다. 카르스트가 만든 봉우리가 이어지는 걸 보니 거의 도착한 듯하다.
<콴펀국수/휴게소의 차호(왼쪽 위/아래), 카르스트 지형(오른쪽 위), 여파 가는 길(오른쪽 아래)>
공(孔)은 공자(孔子)가 아니라 구멍을 말한다. 칠공(七孔)은 구멍이 일곱인 다리다. 대소칠공은 소칠공과 대칠공 두 곳을 합쳐 부르는 말. 소칠공으로 들어서자마자 흰 실이 줄줄이 쏟아지는 듯한 연못과 만난다. 와룡담(卧龙潭)이다. 잔잔하던 물이 급격하게, 넓게 떨어지니 장관이다.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그래도 폭포다. 용이 누웠다는 걸 증명하기에는 좀 어려워 보이지만 말이다. 연못과 폭포를 그럴듯한 입지로 드러내기 위해 만든 인공폭포다.
천종동(天钟洞)은 인공동굴이 아니다. 인간의 지혜와 힘으로 발굴하긴 했어도 자연 그대로다. 700m에 이르는 동굴 에는 종유석의 수많은 궤적이 연출한 별난 동물로 가득하다. 조명이 강렬해 잘 드러나지는 않아도 악어, 금계, 사자, 코뿔소라 붙었으니 그대로 믿는다. 과장법은 여행법이기도 하다. 가운데 우뚝 솟은 거대한 동종(铜钟)은 여느 동물보다 천년의 세월은 더 내공을 쌓았을 듯하다. 올챙이가 줄지어 흘러내리는 듯한 모습은 마치 고대 서체인 과두문(蝌蚪文)과 비슷해 천종이라고 한다. 과두가 올챙이다. 과두문은 치수(治水)로 유명한 신화 속 인물 하우(夏禹) 시대부터 이어왔다고 추정한다. 과장은 역사에도 ‘물 샐 틈 없이’ 자리를 잡고 있다.
<소칠공 서대문/와룡담폭포/천종동 조명(왼쪽 위/가운데/아래), 천종동 천종(오른쪽)>
낙차 30m에 이르는 라야폭포(拉雅瀑布)는 굉음을 쏟고 있다. 하늘로 내뿜고 넓게 추락하는 모양이다. 물살도 그렇지만 웅장한 자태가 시원시원하다. 얼굴까지 사락사락 퍼져오는 물안개가 은근히 마음껏 옷을 적신다. 한여름인데도 서늘한 기운이 퍼지니 점점 폭포와 멀어지게 된다. 야트막한 산에서 용솟음치듯 분출하는 물살이 신비롭기조차 하다. 피 튀기듯 힘쓰다가 조용히 가라앉으면 구채구(九寨沟)도 부럽지 않은 쪽빛을 선사한다.
한없이 푸르른 물빛을 머금고 청출어람(青出於蓝), 소칠공고교(小七孔古桥)를 마주한다. 1835년 청나라 도광제(道光帝) 때 건축된 다리다. 183년 동안이나 꿋꿋하게 유람(幽蓝)의 공간을 이어오고 있으니 장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반원(半圆)으로도 원만(圆满)을 이뤄준 다리를 오래도록 건넌다. 주변 풍광과 어울린 다리는 볼수록 정겹다.
<라야폭포/소칠공 돌다리(왼쪽 위/아래), 소칠공 쪽빛 강물(오른쪽 위/가운데), 소칠공고교(오른쪽 아래)>
소칠공을 나와 3.3km 정도 떨어진 대칠공으로 간다. 더 거대하고 화려할 거라는 선입견은 버려야 한다. 다리만 더 클 뿐이다. 게다가 유람선을 타고 나오면서 멀리 보일 뿐 예술적 멋도 없다. 소칠공보다 20여 년 후 건설됐다가 부서지고 1877년에 다시 세웠지만, 너무 위험해 지금은 현대식 다리로 교체됐다. 그러니 자연스레 관광지 밖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공포협(恐怖峡)이 펼쳐지는 길을 따라 상류로 간다. 왜 협곡을 공포라고 지었는지 모르겠다. 강을 사이에 둔 출렁다리인 조교(吊桥)도 무섭지 않다. 강폭이 점점 좁아지는데 강물은 미동도 없이 잔잔하다. 생각보다 엄청 깊을 듯 하다.
서서히 동굴 속으로 들어서는 느낌이 든다. 거대한 암석이 서로 이은 천생교(天生桥)는 60m에 이를 정도로 높다랗다. 인간은 감히 밟기 힘들며 신선이 오간다는 하늘 다리다. 다리 아래 또는 동굴 입구로 들어서니 신비한 협곡이 다시 열린다. 땅이 하늘에 닿을 만큼 높다는 지아협(地峨峡)은 신선이 머물던 자리라고 해도 믿겠다. 원시(原始)와 범세(凡世)를 가르는 공간이 이렇게 생기진 않았을까? 협곡에 자라는 초록잎을 만져본다. 잎의 시선을 따라 우러러보면 싱그러움을 앗아간 하늘만이 새파랗다. 그래서인지 협곡 위쪽에는 요풍동(妖风洞)이 있다. ‘요괴야! 나와!’ 소리치고 도망칠 만큼 협곡은 넓지 않다.
<대칠공 입구/유람선(왼쪽 위/가운데), 지아협에서 본 하늘(왼쪽 아래), 천생교와 지아협(오른쪽)>
대칠공 입구에는 쪽빛 물에서 자란 민물고기 튀김을 판다. 신선이 먹는 물고기가 아닐런가? 반죽을 입고 한 움큼 튀겨 한 그릇 담는다. 신선의 다리 아래 원시 협곡의 기운을 먹고 자란 튀김은 그러나, 그저 별다르지 않다. 밀가루와 기름의 융합은 너무 진했다. 기대가 후루룩 사라지자마자 색다른 눈요기가 나타난다. ‘수수께끼 같은 지방(谜一样的地方)’이라고 쓴 배너 선간판이다. 신비한 소수민족인 요족(瑶族) 마을인 요산고채(瑶山古寨)를 홍보한다. 무엇보다 ‘가장 패션이 관능적인 민족 복식(最时尚性感的民族服饰)’이란 카피에 홀리지 않을 수 없다. 6km 거리에 있다니 가깝다. 쪽빛 물의 나라에 사는 요족이 갑자기 궁금해진다.
<요산고채 배너 선간판(왼쪽), 대칠공 물고기 튀김(오른쪽 위/가운데/아래)>
비포장도로 따라 매표소를 지나 마을에 들어선다. 전통복장을 입은 요족이 반갑게 맞아준다. 아가씨들은 환영 인사로 노래도 불러주고 대나무 술잔에 경주(敬酒)도 따라준다. 하얀 바지를 입은 총각들은 사냥총으로 축포도 쏜다. 남자가 하얀 바지를 입어서 요족 중에서도 백고요(白裤瑶)라 한다. 여성은 빨강, 파랑, 노랑과 검정이 섞인 치마를 입고 검은색 윗옷을 입는다. 등쪽에는 멋진 자수 문양이 붙어있다.
<요산고채 입구/요족 여성 전통복장(왼쪽 위/아래), 환영 행사/대나무 술잔(오른쪽 위/아래)>
요족이 유명한 까닭은 여성의 윗도리 때문이다. 그저 옷감 두 장을 앞뒤로 이어 입는다. 양옆은 꿰매지 않는 채 입기 때문에 요족 여성을 양편요(两片瑶)라고 부르기도 한다. 모성과 생식(生殖)에 대한 ‘지고지순’의 숭배 사상을 내포한 국가급 무형문화재다. 앞에서 바라보면 단정한 검은 윗옷을 입은 아가씨로 보이지만 옆에서 보면 젖꼭지가 보일 듯 말 듯 ‘좌불안,참불온(坐不安,站不稳)’하다. ‘가장 섹시한 옷’이 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여름에는 천 두 장 외에는 아무 것도 입지 않는다. 정말이지 마을을 개방하면 안 될 일이다.
마을을 둘러보는데 신기한 게 있다. 곡식 창고인 화창(禾仓)이다. 수확한 쌀의 저장고를 부엌과 2~30m 거리를 둔다. 불에서 멀리 두기 위해서다. 자물쇠로 잠그지도 않는 공동체다. 마른 풀을 이어 지붕을 덮고 원추형으로 만들고 나무기둥을 세운다. 요족 창고가 ‘독창’적인 이유는 미끌미끌한 흙 단지를 나무 기둥 사이에 세운다는 것이다. 뱀, 곤충, 쥐로부터 소중한 식량을 보호하려는 지혜다. 음식기행에 어울리는 문화다. 화창을 핑계로 다시 가볼까나.
<요족 여성/벽에 그린 요족 자수/양식 창고 화창(왼쪽 귀/가운데/아래), 화창의 흙단지(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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