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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심 New Story/Food N

나의 생(生)에 위치한 ‘신(辛)’ - 소설가 윤후명


 안녕하세요. 심심블 에디터 마음氏입니다.
 누구나 라면에 얽힌 이야기가 있을 거에요.
 제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라면이 있었으니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있을까요?
 여기 문학인들의 라면에 얽힌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또, 나만의 라면이야기가 있다면 언제든 연락을 부탁드려요. 

 nonie님의 '에어캐나다에서 만난 신라면, 그리고 독도'
 sentimentalist 님의 '융프라요흐에서 신라면으로 든든하게 배채우기'
 SvaraDeva님의 '내가 기억하는 라면' .... 등등등
 
 잠시 검색했는데 정말 여러 추억이 있으시네요.  이곳에서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

 마음氏 _ blog@nongshim.com 


나의 생(生)에 위치한 ‘신(辛)’

윤후명(소설가, 국민대 문창대학원 겸임교수)
 
내가 ‘신’라면 애호가인 걸 알고 이런 청탁이 왔을까?
나는 지금도 빨갛고 까만 포장의 이걸 몇 개 쟁여놓아야 안심이 된다.
내가 살아온 지난 세월은 ‘의,식,주’의 세 가지가 모두 위협받던 시기였기에,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뭐든 있으면 ‘쟁여놓아야’만 목숨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런 위기의식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무슨 어려운 사태가 닥치려는 조짐이 있으면 으레 라면이 동나기 시작한다. 처음 러시아의 문이 열렸을 때, 그곳으로 함께 간 일행 중에는 끼니마다 라면을 계산하여 배낭에 '쟁여'간 사람도 있었다. 
하기야 그곳 호텔에서 잔뜩 기대한 아침 식사가 우리의 라면 하나 달랑이었던 것은 혼란스러운 러시아의 상황만큼이나 놀라운 경험이었다. 

내게는 3, 4년 동안 라면에 의지하여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라면에 대해서라면 내게 물으라는 농담이 오갔을 정도였다. 
그냥 라면만 내내 먹기에 질린 나머지 무슨 풀이라도 곁들여 먹으려고 들에서 소리쟁이 잎사귀를 뜯기도 했다. 요새도 아무 준비 없이 시골에 가서 하룻밤 혼자 지내고 난 아침이면 컵라면에 무슨 풀이건 뜯어 넣는다. 

오랫동안 라면만 먹으려면 양파를 곁들이세요.
나를 긍휼히 여긴 시인 최승자의 조언이었다.
 
두고두고 고마운 조언이어서,
그것은 내가 그 시인을 기억하는 단서가 되어 있다. 
그러나 양파까지 늘 ‘쟁여놓’기엔 내 생활 패턴이 도무지 녹록치 않았다. 

‘신’라면의 봉지에 씌어 있는 ‘辛(매울 신)’이라는 글자가 새삼스럽게 다가온 것은 그 시절이었다.
그때 나는 웬일인지 새롭게 한자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었는데, 라면 봉지의  난데없는 옥편 도안이 눈길을 붙잡았다.
본래 그랬었는데도 지나쳤었는지, 새로운 상품인지는 기억에 흐리지만, 문학을 하자면 한자를 알아야 한다는 내 소신에 맞춘 디자인같이 받아들여졌다. 더군다나 세 끼를 거의 라면으로 ‘때우며’ 지내고 있던 처지였다.

어? ‘신’라면? ‘매울 신(辛)’이라고 한자 공부를? 물론 나는 그 맛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내 단골 메뉴가 된 지 오래였다. 그 맛은 맵다기보다는 ‘새로울 신(新)’에 가깝다고 여기고 있었다.
辛? 新? 아무튼 이제까지의 여느 맛들하고는 다른 맛. 소믈리에처럼 자세히 짚어낼 수는 없지만,
한 마디로 깊으면서도 깔끔하다는, 어쩌면 이율배반적인 표현을 써도 좋을 듯싶었다.
 
나는 라면을 끓이며 ‘辛’자가 들어 있는 글자를 생각하곤 했다. 먼저 떠오르는 낱말, 신산(辛酸).
신산이라는 말은 ‘맵고 시다’는 뜻으로 세상살이의 고됨을 나타낸다고 하지만, 거기에 스산함까지 곁들여 다가온다.
내 생활이 그랬던 것이다. 아니, 이런 문자도 사치에 속했다. 온통 둘러보아도 있는 것은 황폐였다. 
 
하기야 라면이 있으니까.
 
굶어가며 문학을 하겠다는 의지 앞에 상투적으로 놓여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말이 쉽지, 라면이 주식이 되는 데는 질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모두가 떠나고 오로지 홀로 된 나는 다른 걸 해먹을 재간이 없었다.

돈이나 솜씨는 그렇다 하더라도 마음조차 이 세상에 발을 붙이고 있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과연 내게 앞날이 있을까. 라면 봉지를 통해 세상을 내다보던 그 시절.

하지만 남들 말대로 목숨이란 모질었다. 나는 소주병과 라면 봉지가 나뒹구는 방에서 하루하루 연명하며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어느 날, 매울 '辛'자에 한 획만 얹으면 '幸' 즉 행복이 된다는 글자 놀이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辛 + 一 = 幸.’ 고된 생활을 이겨내고 행복에 이르는 것은 젓가락 한 짝만 덧붙여도 되는 일이었다.
한 획! 그러나 한 획, 그 한 획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고 극복하는 게 삶의 고갯길이었다.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내게 주어진 공간은 문학뿐이어서 다른 길로는 옴치고 뛸 수도 없었다.
 
언급했다시피 언제부터인가 '라면과 볼펜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게 문학'이라는 말이 우스개처럼 있어왔다.
컴퓨터라는 게 없던 시절의 그 말은 지금까지도 종종 입에 오르내린다.
하지만 볼펜이야말로 한 획이 아니고 무엇이겟는가. 나는 이제까지 늘 써오던 볼펜을 다시 생각했다.
삶이란 의미 부여라는 깨달음도 그때 얻은 것이었다. 나는 볼펜을 새로이 거머쥐었다. 모든 것은 볼펜으로 '幸'자를 '幸'자로 바꾸느냐 그러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幸'자 위에 볼펜으로 한 획을 만들어갔던 것이다.
'라면과 볼펜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게 문학'이라는 우스개는커녕 교훈이요, 엄명이었다.

나는 곧이곧대로 이 말의 신봉자일 수밖에 없었다. 그와 함께 나는 그 시절을 회상한다.
그리고 이제 제자들에게 말한다.

글자 한 획, 한 획이 생명이야. 그렇게 써나가다 보면 소설 한 편이 되는 거야.

이 말을 하면서 내가 회상하는 공간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 그들에게 말해줄 수 없는 게 안타깝다.
볼펜 한 획으로 辛을 幸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있음을 가르쳐주고 싶은 것이다. 문학이, 삶이 어려울 때마다
내가 지켜온 신념을 가르쳐주고 싶은 것이다.
지금도 내가 그와 같은 믿음으로 글을 쓰는 현역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삶의 의미 부여가 그 한 획에
담겨 있음을 잊지 말자고, 스스로도 되새기는 것이다.


윤  후  명       

강릉에서 태어나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196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197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어 등단하였으며, 지은 책으로는 시집 <명궁>, 소설집 <둔황의 사랑> <협궤열차> <여우사냥> <가장 멀리 있는 나> <모든 별들은 음악소리를 낸다> <삼국유사 읽는 호텔> <새의 말을 듣다>, 산문집 <꽃> 등이 있다. 
한국일보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김동리문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