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심전심 n Talk


 안녕하세요. 심심블 에디터 마음氏입니다.
 누구나 라면에 얽힌 이야기가 있을 거에요.
 제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라면이 있었으니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있을까요?
 여기 문학인들의 라면에 얽힌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이번에는 이병률 시인의 글입니다. 

 또, 나만의 라면이야기가 있다면 언제든 연락을 부탁드려요. 

 농사꾼 조선낫님의 심포항에서 먹은 해물라면 이야기 
 효리사랑님의 편의점 물값 부활의 씁쓸한 컵라면 이야기
 다음 TV팟의 동영상 '라면먹자'... 등등

 삶은 라면,  정말 그렇죠? ^^
 
 마음氏 _ blog@nongshim.com  
 
조금은 다른 짐을 싸야 했다.
내가 삼백만 년 전부터 가고 싶어 했던 곳으로의 여행이다. 이상하리만치 간절했다.
가고 싶었던 만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차올랐으나 가기 전에는 충분하지 않을 것 같았다.
세 달을 예정한 인도 여행이었으므로 짐은 적지 않았다.
비상약을 준비했고 우비와 비타민 그리고 실컷 찍을 수 있을 양의
카메라 필름을 준비해야 했다. 준비는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비상식량을 싸야 했다.
그곳은 내가 상상해 왔으나 동시에 상상할 수 없는 곳이기도 했으므로 어떻게 될지 몰라
신라면 다섯 봉지를 가방에 담았다.
그래도 한 달 정도는 라면 먹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쉽지는 않았지만 다른 것들로 끼니를 해결하면서 가능하면 그들이 먹고 마시는 것들로 끼니를 해결해보는 시도는 분명 재미있었다. 근데 더 이상은 버틸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동안 잠잠했던 몸은 칼칼하면서도 시원한 것을 넣어달라 간절히 애원하고 있었다. 라면 다섯 봉지가 고스란히 여행 가방에 들어 있긴 했지만 그걸 어떻게 먹어야 할지가 고민이었다.
부수어 먹을까도 생각했지만 평소에도 그렇게 하는 것은 라면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생각하는 편이었다.
일단은 라면을 끓여 먹으려면 중요한 도구가 있어야 했다. 릭샤를 타고 큰 시장엘 나갔다.
냄비를 사려다 라면 다섯 개를 끓이기 위해 정녕 냄비를 사야 한단 말인가 하고 고민이 되기도 했지만
어느새 나는 냄비를 사서 담은 봉지를 한 손에 들고 이번엔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사기 위해 온통 시장을 뒤지고 있었다.
흔히 우리가 사용하는 형태의 휴대용 가스레인지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제법 큰 덩치의 비슷한 기구가 눈에 띄었다. 하지만 가격도 크기도 분명한 부담이었다.

그때 떠오른 것이 있었으니 내가 묵고 있는 방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사는 가족들,
움막집에서 어렵게 살고 있는 불가촉천민(접촉할 수 없는 천민이란 뜻으로, 인도의 카스트 제도에서
계급에 속하지 않는 가장 낮은 신분의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 집 아이들과 놀아주기도 하고 사진을 찍은 적도 있었는데 그들이 움막 앞에서 불을 피워
밥을 지어 먹던 것을 생각해 낸 것이다.
나는 그들이 나를 도와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생수와 냄비, 그리고 라면 하나를 들고 그들을 찾았다.
영어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어서 나는 그들이 쓰는 허름한 가스레인지를 가리키며
성냥으로 불을 붙여달라고 말했다. 냄비에 물을 붓고 라면을 끓이는 동안 움막집의 남편과 아내 그리고
네 명의 어린 아이가 그 과정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그들과 나눠 먹어야 마땅했지만 너무 소중한 그것을 나눠 먹는 일은 가당치 않은 일이었으므로 나는 그저 약
간의 사례를 하고는 다 끓은 라면을 들고 찬바람까지 일으키며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러자 아이들이 라면 봉지와 스프 봉지를 차지해 핥으면서 다투기 시작했다. 난 그래도 씩씩하게 내 방으로 돌아와 단숨에 라면 한 그릇을 해치웠다. 다 먹고 나서는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던 것도 같다. 

그 다음은 라면 두 봉지가 필요했다. 어쩌다가 그 지역을 여행하던 한국인을 만났는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내가 라면 끓여 먹은 이야기를 하자 빛나기 시작하는 그의 눈빛을 뿌리칠 수 없었다. 네 달째 인도 여행이었으니 라면 같은 음식이 그리운 게 당연했다. 게다가 그는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처럼 야위었고 무엇보다 여행에 지친 탓인지 기운 없어 보였다.  
그의 빛나는 눈이 이번엔 더 빛났다. 라면 두 개를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끓여 그와 나눠 먹었다.
자, 이제 두 개의 라면이 남았다.
 
그로부터 며칠 후, 그곳을 떠나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한 개의 라면을 끓이기 위해 움막집을 찾았다.
냄비가 늘어난 대신 라면을 줄이는 일도 중요했지만 다른 곳에서 같은 방식으로 라면을 끓이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도 같았다.
역시 움막집의 모든 식구들이 불가에 모여 스프를 냄비에 털어넣고 있는 성스러운 의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이들은 냄비 안에서 끓고 있는 낯선 음식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기도 했다.
 
그의 아내가 나에게 뭐라 말을 걸어왔다. 처음엔 그 말이 뭔지 몰랐으나 가만 그녀의 몸짓을 살폈더니 라면 한 개를 줄 수 있냐는 것이었다. 헉! 나에게 라면이 하나 남았다는 사실을 어찌 알았을까.
나는 얼른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영어로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계속 하나만 먹게 해달라는 몸짓을 해 보였다. 사실,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말을 행동으로 해 보이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손짓 발짓으로 애를 써가며 ‘없다’는 시늉을 해보여도, 그 말은 그들에게 ‘안 된다’는 말로
이해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없다’는 말이 아니라 ‘안 된다’는 말이라면 세상에 그것처럼 치사한 일은 없으리.

나는 라면이 끓는 사이, 라면이 부글부글 완성되는 그 사이, 전속력으로 달려가 마지막으로 남은 라면 한 개를 가지고 돌아와 그들에게 내주었다. 박수를 치는 아이도 있었다. 아이의 엄마는 두 손을 모아 여러 차례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들은 내가 라면을 끓였던 방식으로 라면을 끓였으리라.
여섯 식구가 먹기엔 너무 적은 양의 라면 한 그릇을 나눠 먹다가 아빠와 엄마는 일찌감치 뒤로 물러앉기도 했을 것이다.
나는 라면을 들고 내 방으로 돌아와 마지막 의식을 거행했다.
적어도 인도에서 먹게 될 마지막 라면이었으므로 그 맛은 더욱 강력했다.
 
며칠 뒤, 그곳을 떠나야할 시간이 왔다. 라면 다섯 개의 부피가 줄어든 대신 냄비가 든 가방의 무게는
그전과 비슷한 듯했다. 여행 가방을 끌고 그들이 사는 움막 앞을 지나가고 있을 때 한 아이가 나를 향해
뭐라 소리쳤고 그러자 움막 안에서 식구 모두가 뛰쳐나와 내가 떠나고 있음을 알았는지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마도 그들은 다시는 그것을 먹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가 떠나는 것이 조금 아쉬웠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 아쉬웠다. 그 이별은 유난히 눈동자가 까만 그들 가족과의 이별이기도 했으며
동시에 신라면과의 이별이기도 했으니까.
그 강력한 것. 그 푸근한 것. 그 떨쳐버릴 수 없는 것.
내게 있어 그것의 정체는 신라면이며 동시에 신라면의 강력한 매력을 쏙 빼닮아
사람을 어쩌지 못하게 만드는 여행의 미감, 바로 그것이다.


이 병 률

충북 제천에서 태어나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저서로는 시집 『바람의 사생활』,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와
여행산문집 『끌림』 등이 있으며, 제11회 현대시학 작품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