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야 물렀거라~
찡한 맛, 평양냉면
"날씨도 더운데 시원한 냉면이나 먹으러 갈까?"
때 이른 더위가 기승을 부리면서 올해는 일찌감치 곳곳에서 냉면 타령이다. 특히 최근 심심한 평양냉면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우래옥', '남포면옥', '을지면옥', '강서면옥' 등 장안의 오래된 유명 냉면집은 말할 것도 없고, 비교적 최근에 평양냉면 강호로 부상한 '봉피양', 여의도 '정인면옥', 경기도 판교의 '능라' 등에도 평양냉면을 즐기기 위한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봉피양 평양냉면>
생각해보니 어렸을 적에는 냉면집에 가면 십중팔구는 쫄깃한 면발과 매콤한 양념의 함흥냉면을 주문했더랬다. 자극적인 맛의 함흥냉면이 훨씬 내 구미에 맞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나도 모르게 툭툭 끊어지면서 씹을수록 고소한 메밀면과 시원한 육수가 조화를 이룬 평양냉면을 주문하는 비율이 훨씬 높아졌다.
이번에는 서울 장안에서 평양냉면으로 유명한 냉면집 순례를 떠나보았다. 무더위에 지친 입맛, 시원한 냉면 한 그릇으로 달래보자.
화청한 동치미국물에 말아먹는 메밀국수
냉면을 언제부터 먹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1849년에 쓰인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따르면 "겨울철 제철음식으로 메밀국수에 무김치, 배추김치를 넣고 그 위에 돼지고기를 얹어 먹는 냉면이 있다"고 하였다. 또 1896년에 쓰인 《규곤요람》은 냉면에 대해 "싱거운 무 김칫국에다 화청(和淸)해서 국수를 말고 돼지고기를 잘 삶아 넣고, 배, 밤과 복숭아를 얇게 저며 넣고 잣을 떨어 나니라"라고 기록했다. 1800년대 말의 《시의전서》 냉면 편에는 "청신한 나박김치나 좋은 동치미 국물에 말아 화청하고 위에는 양지머리, 배와 배추통김치를 다져서 얹고 고춧가루와 잣을 얹어 먹는다"라고 기록되었는데, 고기장국을 차게 식혀 국수를 말아 먹는 장국냉면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한편 고종 황제는 평양냉면을 좋아해 대한문 밖의 국숫집에서 냉면을 배달해 편육과 배, 잣을 넣어 먹었다는 기록도 전해지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실향민들의 생계를 유지해준 냉면
냉면은 이북에서 많이 먹었던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한겨울 땅에 묻어놓은 독에서 살얼음을 깨고 동치미 국물을 떠내 국수를 말아 뜨끈뜨끈한 온돌방에서 이를 덜덜 떨어가며 차갑게 먹는 국수라는 의미에서 냉면(冷麵)이라고도 한다.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으로 대표되는 냉면은 한국전쟁 당시 남한으로 피난 온 피난민들이 생계를 위해 고향에서 즐겨 해먹었던 국수를 만들어 팔면서 전국적으로 보편화돼 실향민들에게는 고향을 상징하는 음식과도 같다. 속초, 서울, 부산 등 이북에서 피난 내려온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에 특히 오래된 냉면집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의 중요한 차이점 가운데 하나는 면이다. 함흥냉면은 고구마 전분의 함량이 많아 쫄깃한 면발이 특징으로 회무침과 매콤한 양념이 어우러져 '이열치열'의 화끈함을 즐길 수 있는 것이 매력이다. 반면 평양냉면은 메밀이 많이 함유돼 면이 툭툭 끊어지지만 씹을수록 고소하고 차게 식힌 육수와 시원하게 익힌 동치미 국물을 섞어 만든 육수를 부어 슴슴하게 즐기는 것이 맛이다. 또 평양냉면 전문점은 주문하자마자 메밀면 삶은 고소한 메밀 면수를 잔에 담아 내오지만 함흥냉면 전문점은 쇠고기를 우려낸 육수를 내온다.
<화려한 고명의 진주냉면>
한편 남한에도 지역적인 특색을 담고 있는 진주냉면이 있다. 진주냉면은 고구마 전분과 메밀전분을 섞어 면을 만들고, 육수는 고기육수 대신 멸치, 바지락, 홍합, 북어, 다시마 등 해산물로 우려낸 국물을 사용한다. 여기에 쇠고기 육전을 부쳐 채 썰어 올리고, 달걀지단, 오이, 배 등 고명을 화려하게 올려 평양냉면과 견줄만하다는 평이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평양냉면집
평양냉면은 원래 쇠고기나 꿩, 닭고기를 고아 만든 육수에 시원하게 익은 배추김치 국물이나 동치미 국물을 섞어 만든 국물을 사용했다. 그러나 현대에는 쇠고기 국물을 기본으로 동치미국물을 배합하고 있으며, 처음 평양냉면을 먹는 사람들은 다소 밋밋하게 느낄 수 있지만 몇 번 먹다 보면 시원하고 깔끔한 맛에 점차 끌리는 것이 평양냉면의 매력이다.
서울에서도 손꼽히는 평양냉면집인 「우래옥」은 고기 육수와 동치미 육수를 섞지 않고 순수하게 고기만 삶아 우려낸 육수를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한우 암소의 엉덩이살과 다리살 등 한우를 덩어리째 넣고 4~5시간 푹 삶아 끓여낸 후 냉각시켜 기름을 제거해 만든 육수에 메밀과 녹말가루를 적절하게 섞어 뽑은 면발을 정갈하게 담아낸다. 68년째 한자리에서 3대째 대를 이어 운영하고 있다. 냉면만 먹기에는 왠지 아쉽다 싶으면 불고기와 함께 먹어보자. 불고기를 먹은 후 냉면을 먹어도 좋지만 냉면을 먹을 때 불고기를 한 젓가락 올려서 함께 먹으면 그 맛 또한 별미다.
<(왼) 우래옥 평양냉면, (우) 남포면옥 평양냉면>
무교동 「남포면옥」은 동치미 국물의 찡하면서도 시원한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평양냉면 전문점이다. 양지머리와 사태를 푹 고아 만든 고기 국물과 동치미 국물을 8대 2 비율로 섞어 배합한 육수가 별미. 점포 입구 오른쪽에 담근 날짜가 꼼꼼하게 적혀 있는 동치미 항아리들이 놓여 있어 옛날식 동치미 국물 냉면에 대한 무한 신뢰를 주고 있다. 이곳 조리이사는 평양냉면을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으로 "면이 불면 맛이 없기 때문에 먹을 때 옆 사람이 말을 걸지 않으면 맛있게 먹을 수 있다"고 조언한다.
서울 서소문의 터줏대감 중 하나인 「강서면옥」도 점심때가 되면 인근 직장인들이 줄을 서서 먹는 유명 평양냉면집 중 하나다. '수십 근의 한우를 우려 만든 육수와 구수한 메밀면이 어우러진 최고의 평양식 물냉면'이라는 설명을 메뉴판에 적어둘 만큼 맛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 강서면옥은 '청와대 냉면'으로도 유명하다.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해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 이르기까지 20여 년 동안 냉면 육수를 청와대에 납품을 해 붙여진 별명이다. 3대째 대물림을 하고 있다.
<(왼) 강서면옥 평양냉면, (오) 을지면옥 평양냉면>
을지로 3가에 위치한「을지면옥」은 점심시간에는 반드시 줄을 서야만 먹을 수 있는 서울시내 대표 평양냉면집 중 하나다. 심심하지만 은근한 맛이 감도는 육수가 일품이다. 메밀과 녹말을 섞어 만든 면발은 툭툭 끊어지지 않으면서도 질기지 않아 현대인들이 선호하는 식감이다. 맑은 육수위로 동동 띄운 파와 고춧가루가 포인트다.
이북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은 서울의 수많은 평양냉면집 가운데 고향의 맛에 가장 가까운 냉면집으로 장충동 「평양면옥」을 꼽는다. 육수가 가장 맑고 특유의 밋밋하고 심심한 맛을 잘 살려 정통의 맛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이다. 60여 년 동안 이어오고 있는 평양면옥은 자체 제분기로 하루 사용량만큼 메밀을 직접 제분하기 때문에 끈기 있고 찰진 면발을 선보인다. 육수는 쇠고기 양지, 사태, 설도 부위를 엄선해 2시간 30분간 끓여서 1차로 냉각기에 식히고, 고기와 채소의 불순물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여과를 시켜 냉각통에 보관해 사용하고 있다. 육수는 맑아 심심해 보이지만 실제 맛을 보면 생각보다 진하고 담백하다. 초당두부와 부추, 돼지고기, 각종 채소를 듬뿍 넣은 손만두도 유명해 여럿이 오면 냉면에 손만두 주문이 다반사다.
<평양면옥 평양냉면>
신흥강자로 부상한 평양냉면 핫 플레이스
전통있는 평양냉면집 외에도 최근에 눈에 띄는 평양냉면집도 더러 있다. 봉피양과 정인면옥이 대표적인 신흥강자로 꼽힌다.
<봉피양 평양냉면>
방이동 「봉피양」은 서울시내 유명 평양냉면전문점에 비해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평양냉면으로 유명하다. 대부분 쇠고기로 육수를 우려내는 곳과는 달리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를 함께 넣어 우려내고, 여기에 동치미 국물을 섞어 냉면육수를 완성한다. 면은 거피한 메밀 70%정도와 고구마 전분을 섞어 뽑는데 매끄러우면서도 툭툭 끊어지는 면은 씹을수록 구수하다. 고명으로는 얼갈이배추 김치를 올리는 것도 여느 곳과 사뭇 다르다. 또 삶은 달걀대신 지단과 무, 오이를 올려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정인면옥」은 경기도 광명에서 평양냉면으로 입소문 난 곳이다. 이곳이 최근 서울 여의도에 신규 오픈을 해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다. 특히 새로 오픈한 만큼 깔끔한 실내 분위기와 일부 유명 냉면집의 평양냉면 가격이 1만2000원에 이르는데 반해 이곳은 8000원이라는 착한 가격에 넉넉한 양을 제공해 가격 대비 만족도 측면에서 고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육수는 진하지 않아 다소 심심할 수 있지만 은은하니 구수해 깔끔한 편이다. 냉면과 함께 수육도 인기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