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심전심 n Talk

기억 속 맛을 끄집어내 준 파리의 뒷골목의

베트남 쌀국수(Soupes Tonkinoises)

 

 

 

나는 퍼(Pho)라고 불리우는 베트남 쌀국수를 참 좋아하는 사람이다. 처음 베트남 쌀국수를 접했을 때를 돌이켜 보니 무려 15년이나 지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퍼의 첫 인상이 꽤 강렬했기 때문에, 아직도 처음 맛보던 그 순간을 바로 어제 일처럼 되돌릴 수 있건만 시간은 항상 속절없이 흐른다.


퍼를 처음 접한 곳은 미국 영어 연수 시절, 로스앤젤레스의 어느 쇼핑몰 푸드 코트에서였다. 당시 한국에서 미국에 간 지 얼마 되지 않은지라, 한창 컬쳐쇼크를 겪고 있을 때였는데 그 중 나의 호기심을 더 자극했던 것은, 정말 다양한 음식문화가 섞여 있는 미국 생활이었다. 한국에서는 전혀 알지 못했던 음식들을 접해가던 어느 날, 미국 교포이신 숙모님이 내게 한 번 먹어보라고 권해주신 음식이 '퍼' 였다. 사람마다 호불호가 갈릴 수 있지만, 한 번 맛들이면 절대 끊을 수 없다고 강조하시던 숙모님은 퍼의 열렬한 팬이셨다. 그 분의 말대로 퍼를 처음 접했을 때의 느낌은 난감함 그 자체였다. 당시까지 한번도 맡아 보지 못했던, 묘한 냄새가 풍겨오는 국물에 한술 더 떠서 독특한 향이 감도는 채소가 이것 저것 올라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숙모님은 웃으면서, 코리앤더(고수)는 처음에 먹기가 쉽지 않으니 싫으면 빼 놓으라며 직접 먹는 방법을 알려 주셨다.


국수를 주문하면 미리 서빙되는 숙주와 향채소를 국물에 밀어 넣고, 레몬즙을 짜 넣은 후 취향에 맞게 굴소스나 칠리소스를 적당히 넣고 섞었다. 소스를 얼마나 넣어야 할 지 감이 잡히지 않아, 나는 숙모님을 따라 하려다 먼저 국물 맛을 보았는데, 생각보다는 구수하고 깊은 육수에 놀랐었다. 레몬즙을 꾹 짜 넣어 다시 맛을 보니 시큼한 레몬 향과 국물의 조합이 의외로 좋아서 나는 소스를 첨가하지 않고 그 자체로의 쌀국수를 먹었다.


세계 도처에 있는 한식당들의 시작이 그러하듯, 당시 머물렀었던 캘리포니아 지역 곳곳에 퍼져 있는 베트남 식당들도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고단한 하루를 여는 이민자들의 생활 터전이었다. 물론 장사가 잘 되는 곳의 경우 식당 주인이 베트남 사람이 아닌 경우도 있었지만, 점점 퍼에 맛을 들이면서 알음알음 찾아가게 되는 식당들은 소박한 규모에, 베트남 가족들끼리 운영하는 곳이 많았다. 별 다른 실내 장식도 없이 약간은 침침한 불빛에 휑한 가게 안에서 멜라민 식기에 그득히 담겨 나오는 퍼는 왠지 국물도 더 진하고 내용물도 많았는데, 가격은 더 쌌다. 국물까지 남김없이 다 마시고 돌아나오면서 영어 인사 대신 엄지손가락을 치켜 들어주면, 윗잇몸까지 다 드러낼 정도로 씨익 웃어주는 베트남 사람들의 순박한 미소를 만날 수 있었다.


지난 6월 초에는 프랑스 파리 여행을 가게 되는 기회가 생겼다. 파리 여행을 계획하며 이런 저런 정보를 수집하다 보니, 파리의 베트남 식당에 대한 기사를 접하게 되었는데 그 순간, 십여 년 전 어느 베트남 식당에서 먹었던 퍼의 느낌과 맛이 머릿속에 그대로 재현되었다. 음식에 대한 기억이란 참 신기하기도 하지. 한동안 잊고 있었던 그 맛을 다시 찾고 싶다는 생각에 어느 베트남 식당의 주소를 메모장에 적어 넣었다. 어차피 제대로 하는 프랑스 요리를 접하기 힘들다면, 다른 나라 음식이라도 먹어보는 게 낫다는 생각도 있었다.


내게 파리라는 도시는 아무래도 미식의 도시라는 이미지를 빼놓을 수 없긴 하지만, 실제로 처음 갔을 땐 실망이 컸다. 처음 파리를 방문한 건 삼 년 전이었다. 세계 스타 레스토랑의 기준을 세운, 프랑스 음식의 권위를 생각하면 길거리마다 멋진 레스토랑이 차고 넘칠 것 같았는데, 사전 조사가 부족한 한 여행객이 들어간 식당들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운이 없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우연히 방문했던 카페나 식당들은 그다지 친절하지도 않았고(음식을 테이블에 던지듯이 날라다 주었다) 난감한 불어 메뉴판 사이에서 겨우 알아보고 주문한 음식들은 어떤 경우 잔뜩 타서 나오거나 아니면 무진장 짜기만 했다. 곁들여 나오는 바게뜨만이 유일한 위로일 뿐, 음식의 신선도 자체도 의심스러운 경우가 종종 있었다. 게다가 파리의 물가란, 생각보다 높아서 식비 지출은 늘 세워둔 예산보다 초과하기 일수였기 때문에 한번은 패스트푸드점에 들어가 한 끼를 때운 적도 있다. 파리까지 와서 빈약한 햄버거로 식사를 할 거라고는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파리의 에펠탑은 늘 멋지지만, 파리의 음식들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어쨌든, 6월 초 치고는 태양이 작렬하던 어느 더운 오후 점심 시간을 약간 넘긴 시간에 나는 파리의 13구역을 찾아갔다. 13구역은 소위 파리의 차이나타운이라 불리는 곳이라 하는데, 베트남 식당들 외에도 중국식당이나 다른 아시아 식당들이 모여 있는 지역이라고 한다. 시내 주요 관광지와는 좀 거리가 있는 까닭에 이동을 하기 위해서는 지하철을 이용해야 했다. 역과 역 사이의 거리가 짧은 이유로 꽤 많은 정류장을 지나가는 느낌이 드는 파리의 지하철 열차 안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내리고 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피부색이 각각인 사람들이 몰려 있는 만큼, 귀에 들려오는 언어들도 각양각색인 이 곳이야 말로 진짜 코스모폴리탄의 도시라는 생각을 했다.

 

<파리 13구역, Tolbiac 거리 주변 풍경> 

 

 

 

내가 찾아갈 식당의 이름은 Pho Banh Cuon 14 였다. 파리 여행을 다녀왔다는 우리나라 블로거들이 가장 많이 포스팅하는 식당이기도 하다. 그 식당 주변에도 다른 베트남 식당들이 여럿 들어서 있는데, 직접 가 보니 Pho Banh Coun 14 외에 다른 집들엔 거의 손님이 없었다. 아마도 식사시간을 좀 지나 방문해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주변 식당들 중에선 내가 찾은 곳이 제일 규모도 커 보이고 손님도 아직 여럿 있었으니 파리에선 그래도 그 집이 유명한 곳이긴 한 것 같았다. 햇살이 그득한 날이라 식당 밖에 주르륵 진열하듯 놓여진 테이블과 의자엔 사람들이 옹기종기 앉아 있었는데, 실내에는 생각보다는 사람이 적었다. 밖이 덥게 느껴져 일단 안으로 들어갔는데, 여느 프랑스 카페처럼 실내 테이블 간격이 매우 좁다. 베트남 사람으로 보이는 여자 종업원이 웃으면서 아무 곳이나 앉으라고 손짓을 해 주었다. 자리가 여유 있어 보이는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빠르게 날라져 오는 메뉴판을 받아 들며 주변을 보니, 프랑스 현지인들의 모습도 눈에 들어온다. 메뉴를 보니 퍼 외에도 다양한 베트남 음식들을 제공하고 있었는데, 불어와 베트남어, 영어가 같이 명기되어 있고 사진도 있어 메뉴를 고르는 데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

 

<큰 간판이 한 눈에 들어오는 Pho Banh Cuon 14의 외관> 

 

 

 

메뉴를 보니, 퍼를 불어로는 Soupes Tonkinoises 라고 써 놓았다. 한글 발음으로 굳이 적자면 '슾 동끼누아즈' 정도 되려나. 일반적으로는 Tonkinoise라고만 해도 뜻이 통하는 것 같다. 원래 뜻은 Tonkin(하노이를 중심으로 하는 베트남 북부 지역을 이르는 말, 1873년 이후 프랑스가 점령한 적이 있음) 사람 혹은 그 지역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그래서 퍼가 프랑스어에서 유래한 단어이며, 프랑스 식민지 시대를 거치며 완성된 음식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랑스 통치의 영향으로, 프랑스 식민지가 되기 이전까지는 쌀국수에 고기를 넣지 않았던 베트남 사람들이 고기를 국수에 넣어 같이 먹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니 말이다.

 

<Pho Banh Coun 14의 내부>

 

 

 

보통 베트남 식당에 가면 식전 메뉴로 많이 주문하는 짜죠는 영어로 Fried Spring Roll, 프랑스어로는 Nem (넴)이라고 부른다. 고기와 채소를 다져서 쌀로 만든 얇은 피 안에 넣은 후 튀긴 음식으로 베트남 느억 맘에 레몬즙과 설탕을 섞은 소스에 찍어먹는다. 짜조의 맛을 보니 돼지고기를 주로 쓴 것 같았다.  여기서 주문한 쨔죠(chả giò)는 상추와 민트 잎을 듬뿍 곁들여 줘서 신기했다. 지금까지 여행한 동남아국가들(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베트남)에서 이렇게 나오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메뉴판에 퍼의 종류가 한 예닐곱개는 되어 보였는데, 나는 그저 가장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퍼 보(Pho Bo)를 주문했다. 퍼 보(Pho Bo)는 얇게 썰은 쇠고기를 뜨거운 퍼 국물에 익혀 먹는 국수이다. 주문을 하고 나니 테이블 위에 바로 숙주와 양파 절임, 그리고 이런 저런 허브를 함께 담은 큰 접시, 레몬조각과 소스를 담은 작은 접시를 놓아준다. 우리나라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베트남 쌀국수 프랜차이즈 식당에 가면, 이것과는 참 대조적인 모습을 봤던 기억이 났다. 국수를 주문하면 가져다 주는 접시에는 유난히 가느다랗고 길쭉길쭉한 숙주만 듬뿍 쌓여 있곤 했었는데, 여긴 짧고 통통한 숙주보다도 두어 가지의 허브가 더 주인공처럼 보였다. 한 5-6년전에 출장으로 방문했던 베트남에서 맛을 보았던 쌀국수도 생각났다. 호치민의 한 쌀국수 식당이었다. 영어가 통하지 않아 손짓만으로 대략 국수를 주문했더니 이런 곁들임 접시가 제공되긴 했는데, 숙주는 거의 없고 박하 향이 훅 느껴지는 길다란 줄기채소와 이런 저런 다른 향 채소들이 듬뿍 담겨 나왔었다. 당시에는 다양한 채소의 향 때문에 그걸 어떻게 먹나 싶어 몇 개 넣지 않고 국수를 먹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호치민에서만 느낄 수 있는 향이 아니었던가 싶다.

 

<상추와 민트 잎을 듬뿍 곁들인 쨔죠(chả giò)와
퍼 보(Pho Bo)에 함께 제공되는 채소와 소스>

 

 

 

곁들임 채소를 바라보고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는데, 바로 이어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쌀국수 그릇이 바로 내 앞에 놓여진다. 파리나 독일의 어느 레스토랑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속도다. 젓가락을 들고 곁들임 채소를 국수 그릇 안에 밀어 넣은 후, 레몬즙을 짜 넣고 그릇 안에 들어 있던 쌀국수를 위로 꺼내 휘저었다. 은은히 뿜어져 나오는 향신료의 묘한 향에 국물을 떠 맛을 보았다. 순간, 정말 찰나였지만 베트남에서 직접 맛을 보았던 그 쌀국수 국물의 맛이, 그리고 오래 전 캘리포니아에서 맛을 보았던 어느 허름한 베트남 식당의 쌀국수 맛이 그대로 재현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건 마치, 우리나라와는 전혀 상관 없는 어느 외딴 도시의 한식당에서 잘 고아져 나온 설렁탕 한 그릇을 대하는 것과 같은 기분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너무도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억 속, 아시아의 맛과 향기에 나는 저절로 감탄했다. 비록 베트남에서 맛보았던 생면의 맛은 아니었지만, 힘있게 씹히면서도 매끄러운 쌀국수를 고기, 향채소와 함께 맛을 보는 순간에는 내가 얼마나 감자와 치즈, 고기를 주로 소비하는 독일 레스토랑의 뻔하고 뻔한 메뉴들에 질려있었는지를 깨달았다. 파리의 흔한 길거리 식당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뭔가 완성된 한 그릇을 먹고 있다는 기분에 여행 사이 지친 마음까지도 위로 받는 것 같았다.

 

<힘있게 씹히면서도 매끄러운 쌀국수, 퍼 보(Pho Bo)>

 

 

되도록 천천히 음미하면서 식사를 끝내고 계산서를 받았다. 총 계산된 가격은 파리의 일반 식당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가격이다. 한 그릇에 10유로도 안 하는 가격이라니. 순간, 약간은 찡한 마음도 들었다. 오래 전, 캘리포니아의 베트남 식당의 오픈 주방 칸막이 너머에서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는 내게 미소를 보였던, 허름한 차림의 베트남 요리사가 생각났다. 고단한 식민 시대 이후 혼란한 정치상황에 밀려 세계 여러 나라로 흩어진 보트 피플들이 프랑스이건 미국이건, 또 혹은 다른 나라에서 정착하기 위해 끓여대고 삶아낸 음식은 어쩌면 이렇게도 진한 향으로 남는 것일까.

 


음식값을 치르고 나서 밖으로 나왔다. 그들의 힘겨운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새로 내딛는 거리의 하늘은 여전히 눈부시도록 푸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