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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odle talk

[푸드칼럼] 칭저우 문화거리, 맹자 후손의 비단가게 저우춘, 공자의 향기 취푸

칭저우 문화거리,

맹자 후손의 비단가게 저우춘, 공자의 향기 취푸

 

 

 

서해안에서 가장 가까운 땅, 산동(山东). 그 옛날 제(齐)나라와 노(鲁)나라의 영토였다. 중원에서는 동이(东夷)라고도 불렀다. 역사문화 마을이 꽤 풍부한데, 발길이 그다지 많이 닿지 않는 곳이 많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화교 중 상당수가 산동 출신이고 우리 ‘중국집’의 메뉴는 대체로 그들에 의해 걸렸다고 봐야 한다. 배를 타면 산동 연안에 하룻밤에 도착하고 비행기는 칭다오(青岛)까지 채 1시간이면 닿는다.


칭다오에서 서북방면 3시간 거리에 있는 칭저우(青州)는 수천 년 고도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책인 <상서(尚书)>(서경书经이라고도 함)에 나오는 우공구주(禹贡九州)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하상주 시대의 중원 영토를 아홉으로 나누어 기록한 것이니 예부터, 어쩌면 산동에서 가장 어른스런 이름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고대 지리 개념으로 동방은 오행 중 나무라 인식하고 나무(木)는 곧 푸를 ‘청(青)’이라 했다.


<자오더구제(왼쪽), 황먼지 요리(오른쪽 위), 회족 시장(오른쪽 아래)>

 

 


칭저우에는 중국문화부가 2009년 최초로 10곳의 중국역사문화거리를 선정할 때 당당하게 뽑힌 자오더구제(昭德古街)가 있다. 중국문화를 좀 아는 사람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모두 알만한 거리가 선정된다. 그만큼 역사적 가치가 높다.


거리에 들어서자마자 루차이(鲁菜)를 대표하는 황먼지(黄焖鸡)에 눈이 간다. 팔각과 계피 같은 약재, 표고와 목이 등 버섯과 죽순, 피망과 함께 닭을 푹 삶은 요리다. 산동에서는 보양식으로도 알려졌는데 맨밥과 함께 주로 먹는다. ‘찜닭’과 비슷한 입감인데 약재가 들어가서 한약 냄새가 좀 나지만 닭 신선도로 둘째가면 서러운 고장이 산동인지라 신선한 육질이 맛을 한결 부드럽게 해준다.


자오더 거리는 고성에서 회족이 거주하던 곳이다. 거리에는 그 옛날 페르시아에서 건너온 회족답게 꼬불탕한 글자가 많이 붙어 있다. 집마다 대문 앞에 액자처럼 걸어둔 걸 보면 아마 액막이의 뜻인 듯하다. 대문에는 또 한족, 특히 산서 상인의 상혼이 깃든 합체 자도 많이 붙었다. 초재진보(招财进宝) 네 글자가 하나로 ‘부와 보물이 들어오라’는 마음이 페르시아 모어에 버금가지 않을까 싶다.

 

<페르시아어(왼쪽 위), 복과 재물의 초재진보(왼쪽 아래), 흰닭(오른쪽 위), 일문과제 패방(오른쪽 아래)>

 

 


칭저우에서 서쪽으로 1시간 거리에는 강상(姜尚, 강태공)의 봉국인 제나라의 도읍 쯔보(淄博)가 있다. 천하의 낚시꾼이자 정치가인 그는 무왕을 도와 천하를 평정한 후 제나라의 시조가 됐다. 지금은 도시화로 인해 그 흔적은 많이 남지 않지만 실크로드의 발원이라 자랑하며 저우춘(周村)이 비단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상업거리로 유명해 중국인들은 비단의 출발지라는 뜻의 물 없는 부두, 한마터우(旱码头)라는 별명으로 부른다.

 

<물없는 부두(왼쪽 위), 비단옷(왼쪽 아래), 오성홍기 원단(오른쪽 위), 실크로드 발원지도(오른쪽 아래)>

 

 


맹락천의 상인정신은 배울 점이 많다. 가뭄 등으로 흉년이 들면 자신의 부채는 당장 갚고 남의 부채는 탕감해주는 도덕적인 장사꾼이었다. 큰 비단가게인 루이푸샹이 더 유명한 건 중국공산당의 건국 선포에 천안문광장에 내걸린 국기가 바로 루이푸샹의 비단이다.

저우춘의 명물은 화덕에 구운 빵인 샤오빙(烧饼)이다. 밀가루 반죽을 얇게 펴 깨를 입힌 것으로 바삭바삭하고 고소하다. 저우춘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지면서 이 샤오빙도 함께 널리 퍼져나갔다. 특히, 기차 역에서 불티나게 팔렸다고 한다. 보통 다른 지방은 반죽 속에 고기나 채소를 넣어 만드는데 저우춘 샤오빙은 아주 얇게 넓게 만드는 게 특별하다. 서태후도 이 샤오빙을 즐겨 먹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현장에서 직접 제작하는 공정도 볼 수 있다. 입에 대면 계속 손이 가는 맛이 군것질로 최고다.

 

 <샤오빙 제조(왼쪽 위), 샤오빙 파는 기차역(왼쪽 가운데), 샤오빙 홍보(왼쪽 아래), 샤오빙(오른쪽)>

 

 

 

상업으로 번성한 저우춘에는 유명한 인물도 많다. 무장원(武状元)에 급제한 왕응통(王应统)은 서북의 강력한 준가르(최후의 유목왕조를 유지한 민족) 반란을 평정한 공로로 강희 황제의 친필 ‘복(福)’자를 하사 받았다. 황제는 늘 설날이면 공신에게 ‘복’을 나누어 주는데 글자 속에 ‘재물’, ‘자손’, ‘장수’, ‘부귀’, ‘총명’에 관한 글자를 조그맣게 숨겼던 것이다. 이를 ‘천하제일복’이라 부른다. 오복을 다 기대하며 비석을 만져보지 않고 지나치긴 어렵다.

 

<장원부(왼쪽), 천하제일복(가운데), 금일무세비(오른쪽)>

 

 

 

저우춘에서 남쪽으로 3시간을 내려가면 취푸(曲阜)다. 노나라 땅에 예부터 언덕이 있어 불리게 된 지명으로 공자(孔子)라는 이름만큼 유명한 공자의 사당 공묘(孔庙), 후손의 저택 공부(孔府), 공동묘지 공림(孔林)이 있다. 이 셋을 묶어 삼공이라 하며 당연히 세계문화유산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인구 60만 명 정도로 중국에서는 비교적 소도시이지만 역사문화 도시의 거리는 아주 깨끗하고 한산하다.


저우춘에서 남쪽으로 3시간을 내려가면 취푸(曲阜)다. 노나라 땅에 예부터 언덕이 있어 불리게 된 지명으로 공자(孔子)라는 이름만큼 유명한 공자의 사당 공묘(孔庙), 후손의 저택 공부(孔府), 공동묘지 공림(孔林)이 있다. 이 셋을 묶어 삼공이라 하며 당연히 세계문화유산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인구 60만 명 정도로 중국에서는 비교적 소도시이지만 역사문화 도시의 거리는 아주 깨끗하고 한산하다.

 

 

<우마츠제(왼쪽 위), 야시장 꼬치와 훈툰(왼쪽 아래), 공묘 옆 궁궐거리(오른쪽)>

 

 

하지만 밤이 되면 우마츠제(五马祠街)에 야시장이 열리고 관광객과 현지인이 섞여 인산인해를 이룬다. 다섯 마리 말을 끄는 태수(太守) 관직을 은유로 표현한 것인데 명나라 때 고관대작이 된 공자 후손의 사당이 있던 거리다. 양고기, 닭 날개 꼬치도 야시장에서 빼놓을 수 없지만, 중국식 만두국 훈툰(馄饨) 한 그릇을 곁들여도 좋다. 꼬치와 맥주 한잔하고 공묘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호텔에서 하루를 묵는다. 공묘에 갈 때마다 묵는 취에리(阙里) 호텔, 이름도 ‘궁궐’의 냄새가 난다. 숙박료도 비교적 저렴하고 안락하지만, 무엇보다 전화로 예약하고 도착 후 지급해도 된다. 물론 성수기를 빼고 말이다.


공자의 위패가 있는 공묘 대성전은 마치 황궁을 방불하게 한다. 성스러운 저택 공부에는 상상의 동물 기린(麒麟)을 새겨 ‘욕심에는 끝이 없다’는 것을 경계하는 계탐도(戒贪图)의 교훈이 도안만큼 다채롭다. 공림에 누운 공자 묘에는 명나라 때 전서(篆书)로 새긴 ‘대성지성문선왕묘(大成至圣文宣王墓)’ 비석이 인상적이다.


<공자(왼쪽), 공묘 대성전(오른쪽 위), 공부 계탐도(오른쪽 가운데), 공림 공자묘(오른쪽 아래)> 

 

 


의례는 공묘에서 약 30분 정도 간략하게 치르는 문화행사이지만 화려한 옷차림과 각종 제례악기가 동원된다. 그 옛날 공자를 숭상하던 시대의 제례를 조금이나마 볼 기회다. 황제의 지위를 나타내는 용과 구슬이 조각돼 있고 황금빛 문양, 은은한 녹색과 파랑, 빨강이 혼합된 칼라가 눈을 사로잡는다.


 

<대성전 편액(왼쪽 위), 공자를 향한 제공의례 행사(왼쪽 아래, 오른쪽 위 아래)>

 

 

 

산동은 기원전 분봉제(分封制) 시대부터 이어진 제나라와 노나라 문화가 여전하다. 공맹(孔孟)의 흔적도 많다. 상인과 종교가 혼합돼 있고 음식과 역사도 공존한다. 다른 지방에 비해 훨씬 오래된 기원전 역사와 함께 거리를 거닐어야 하니 숨이 턱에 좀 닿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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