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심전심 n Talk


 심심블 에디터 마음氏입니다. 
 2008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네요. 지나고 나면 다시금 추억이 되겠죠. 

 누구나 라면에 얽힌 추억이 있을 거에요.

 제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라면이 있었으니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있을까요?
 여기 문학인들의 라면에 얽힌 추억을 소개합니다. 

 이번에는 시인이자 사진작가인 신현림 님의 글입니다. 


장마 때라 비만 내린다. 밖에 나가기도 여의치 않아 집에서 뒹굴거린다.
"세상에서 제일 편한 건 역시 눕는 거야."
이렇게 뇌까리며 책을 읽다가 빗소리에 취한 나는 뱃속이 출출했다.
무엇을 먹지, 하며 냉장고를 뒤지다가 김치를 보았다.
아, 오늘은 라면에 김치를 먹으면 좋겠구나, 싶었다.
비오는 날엔 간식으로 뜨거운 라면을 빼놓을 수가 없다.
마침 집에 오기로 한 후배한테 전화가 왔다.

"밥 먹었어? 아직 안 먹었으면 같이 라면 먹을래?"
"좋죠. 전 라면 중독이에요."
"라면이 뭐 육감적인 매력이라도 있나?"
"혀끝을 맴도는 귀여움이랄까. 하루 한 끼라도 안 먹음 못 견뎌요."
"흐음, 혀끝을 맴도는 귀여움... 생긴 게 귀여운 파마머리 같긴 하지. 얼른 와."
사람들의 식성들은 저마다 이렇게 다르다니...

저마다 음식에 대한 소감도 다르고 편애하는 임식들이 있어 삶의 다양한 문화를
만들고 삶이 더욱 흥미로운지도 모른다.

문득 내가 스무 살 때 발견한 이성부 시인의 시 <라면가>가 생각났다.
나는 이 시를 참 좋아했다. 정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서 펜을 꼭꼭 눌러 베껴써서 보내던 이 시를
다시 읊으며 아련한 추억에 젖는다.
누런 막걸리 냄새 푹푹 풍기면서 그 누구든 노동으로, 괴로움으로 추운 몸과 마음을 녹여줄 것 같은 시. 내 스무 살의 절망까지도 위로해주었다.

왜 맨 정신으로 말을 못 하오
무엇이 두려운지 무엇이 사람의 마음에
화살로 박히는지,
형들은 똑똑히 알고 있지 않았소
셋방으로 돌아가 쓰러지면
손에 쥐어진 라면 한 봉지가
형들에게 새벽을 알려주오.
 
일터에 나가면
도로 튼튼해진 마음과 마음들이
굵은 팔뚝으로 악수를 하오
밤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게 다행이오
하루 두 끼 즐겁게 라면을 먹고도
형들에게는 더욱 큰 힘만 쌓여가오.
 

  우리에게 라면은 남다른 것이다. 음악소리처럼 흘러가며 입속으로 쏙 들어오는 느낌도 좋구,
값이 싸서 그 편안함이란 악수할 때와도 같은 기분이다.
어린 시절과 청년기를 라면 먹고 컸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우리의 간식이자 주식이기도 했다.
라면스프 대신 된장을 풀어 라면국물을 만든 후 라면을 넣어 끓여먹는 맛은 각별하다.
그리고 라면에 김치를 얹어먹는 식사는 어느 저택의 화려한 식사도 부럽지 않았다.
 
한 입 가득 빨려 들어오는 라면과 김치로 굶주린 배가 은행처럼 든든해질 때 삶의 의욕은 타올랐고
사람과 사람간의 정은 두터워졌다. 초라한 술집에서 흥분과 열정이 흐르는 대화 속에서 거나하게 취한 이들의 가슴속을 덥혀가던 라면은 분홍빛 무명실보다 부드럽고 기분 좋은 그 무엇이다.
늘 책 읽고 글을 쓰다 보면 새벽에 잠자리에 들기 일쑤다.
자정쯤이면 허기가 지고 밥을 먹기엔 부담스럽고 반찬도 마땅치 않을 때 라면을 끓였다.
라면 한 봉지,
펄펄 끓는 라면 한 그릇의 기쁨은 6시간을 충분히 버티며 내 정신의 식사를 채워가던 도서실의 추억을 불러온다. 이것을 함께 나누면 얼마나 행복한지...
 
후배가 드디어 왔나보다.
"선배 나 왔어. 우리 라면 끓여먹자."
"이제 다 끓여가."
"파 넣는 거 잊지 마."
"그래, 파 송송 얼큰 행복, 후후."
라면의 화룡정점은 살짝 얹은 후춧가루이기도 하고, 파이기도 하다. 기름기 있는 라면 국물 맛을 담백하게 만드는 깔깔하면서도 매끄러운 파냄새... 흐음, 얼른 먹어야지.

"맥주 한 컵이 바다 같아." 이렇게 내가 말을 꺼내자,
"그것도 황혼이 지는 바다겠지." 친구가 변죽을 울렸다.
맥주 한 컵이 황혼이 지는 바다라...  꽤 근사했다.
깊이 취하지도 않고 약간 눈물이 글썽일 정도의 맥주가 몸 안으로 파고들면
그 이상한 기분.  내 존재감이 물을 엎지를 때처럼 흥건해진다.
대지의 뜨거운 기운과 슬픔이 밀려들어 내 몸 세포 하나하나가 깨어 우는 걸 느꼈다.
 
사람들이 모두 잠든 밤.
그 옛날 조용히 부엌에 내려가 라면을 끓여먹던 밤의 불빛 한 줄기가 가슴속에 흘러든다.
기분 좋은 하루가 시작되는 걸 알려주는 라면. 그리고 내 몸을 덥혀가는 술 한 잔은 인생의 남다른 묘미를 전해준다.

신 현 림
경기도 의왕에서 태어나 아주대에서 문학을, 상명대 디자인대학원에서 사진을 전공했으며, 한국예술종합학교와 아주대에서 텍스트와 이미지, 시 창작을 강의했다.
시집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 『세기말 블루스』, 『해질녘에 아픈 사람』, 사진에세이집 『나의 아름다운 창』, 미술에세이집 『신현림의 너무 매혹적인 현대미술』, 박물관기행산문집 『시간창고로 가는 길』 등을 펴냈다.